누구나 꿈꾸는 ‘제2의 인생’은 어쩌면 ‘아름다운 그림’과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주제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 그려졌든, 그것은 아마도 화려하면서도 영롱한 빛을 간직한 모습일 게다. 또한, 누구에게나 인생의 시련은 있게 마련이고, 이를 극복한 삶 이후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몸의 병이 마음이 병으로 변해가고 있을 즈음,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떠나게 된 ‘여행’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게 됐다는 작가 한성복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10여년 전쯤 건강검진을 받다가 우연히 발견됐는데, 일종의 눈 중풍인 망막 폐쇄증이라 하더라고요. 교수님 말씀이 눈으로는 최고 위험한 수술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수술 후 아무것도 안보였으니까… 그냥 깜깜했어요.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다는 두려움에 굉장히 힘들었는데, 마음의 병이 더 심했었죠.”
어쩌면 늦은 나이에, 그것도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용기를 낸 여행길에서 그녀를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영감으로 다가온 건, 바로 ‘자연’이었다. 그리고 작가에게 크나큰 위안이 된 자연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물론, 한 작가를 귀하게 여기는 선생님들의 권유와 가르침도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풀잎들, 작은 물줄기가 큰 힘을 가지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계곡, 잘 찾아왔다고 철썩이며 반겨주는 듯한 바다까지. 여행에서 만난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은 특히, 작가의 시점에서 바라본 색감 그대로 캔버스 위에 입혀졌다.
“지금은 이제 적응을 하고, 그 눈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는 그녀다. 물론 다초점 안경을 쓰지 않으면 매사 어려운 일 투성이지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감사한 일이라고 한 작가는 말한다.
“가족의 도움이 없었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여행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게다가 남편과 아들, 딸이 곁에서 많이 응원해 주고, 부족하지만 늘 ‘잘한다’, ‘최고다’라고 해주니까 제가 힘을 내서 오늘에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웃음)
아니나 다를까, 이번 전시에도 그들이 제일 먼저 찾아와 한껏 힘을 보태고 돌아갔단다. “대단하다. 해낼 줄 알았다”면서 말이다. 오랜 준비와 기다림 끝에 갖는 첫 번째 개인전인 만큼 부담감도 상당했던 게 사실인데, 역시나 그때마다 가족들의 ‘할 수 있다’는 격려가 큰 버팀목이 됐다.
‘자연과의 대화’를 주제로 수원시립만석전시관 제3관에서 오는 25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선 총 32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 중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연필로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다독여주는 든든한 지원군인 남편의 모습을 담은 작품, 가장 좋아하고 의지하는 막내 동생의 경찰공무원 퇴직을 기념하며 그린 인물화 등이 우선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지난해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청춘의 꿈’을 비롯해 붉은 빛깔의 꽃잎이 매혹적인 ‘어느 여름날에’, 탐스럽게 익은 사과가 군침을 돌게 하는 ‘결실’, 청송의 맑은 계곡물이 당장에라도 풍덩하고 싶게 만드는 ‘봄은 온다’, 마치 남해의 야경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남해의 야경’ 등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발길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애정하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한 작가는 ‘우유니 사막을 걷다’와 ‘상락아정’이란 작품을 가리켰다. 짐작컨대 ‘우유니 사막을 걷다’에 등장하는 한 여인은 작가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딱 맞췄고, ‘상락아정’에 대해선 설명이 필요했다.
“제 작품 속 장소들 중 우유니 사막에만 못 가봤거든요.(웃음) 언젠가는 가서 이렇게 걷고 싶다는 꿈을 그린 거예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불교용어로, 2021년도 전국대회에서 특선을 받은 작품이에요. 당시는 코로나19로 인해거의 모든 게 중단되고 다들 힘들어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작업에 임했습니다.”
그저 불행하다고만 여겨졌던 순간이 그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며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었다는 한성복 작가.
자연에서 얻은 위로 덕분에 생긴 마음의 여유는 자연스럽게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녀가 표현하는 세상의 색감을 한없이 밝고 예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봄이 오는 길목,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난 한 작가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위로와 평온을 전해주기에 충분한 것 같다.
*법신과 열반의 네 가지 덕인 상·낙·아·정을 의미하는 불교교리. 열반과 법신은 네 가지 덕성을 갖추었는데, 첫째는 영원하여 변하지 않는 상(常), 둘째는 고통이 없는 안락한 낙(樂), 셋째는 진실한 자아로서 아(我), 넷째는 번뇌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정(淨)이다.